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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story/역사 문학 그림

태평천국운동

태평천국 운동은 청말 부패한 내정과 외래 자본주의 침입으로 빚어진 사회 경제적 혼란 가운데 일어난 농민운동의하나였다. 이 운동의 지도자 홍슈취안은 꽝뚱성의 客家 출신으로 '과거 낙방생'이었다. 그는 아편전쟁의 패전을 직접 체험한 뒤『勸世良言』이란 책을 읽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上帝會란 기독교적 비밀결사를 만들어 1850년 滅滿興漢의 치를 내걸고 꽝시성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만주 풍속인 변발을 버리고 중국 고유의 장발을 하였기 때문에 長髮賊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소규모의 반란이었으나 빈농, 비적, 유민과 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지식인의 지지를 얻어 불과 6년만에 양쯔강 이남을 거의 점령하고 1853년에는 난징을 함람시켜 이를 天京이라 고치고 태평천국을 세웠다. 홍슈취안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워 天朝田畝制度를 공포하여 경작자에게 토지를 균등히 나누어주고, 지세를 감면하였으며, '전족', 노예 매매, 아편 흡연을 비롯하여 매매혼, 축접, 매춘, 음주, 도박까지 嚴禁하고 남녀평등권을 인정하여 직업상 같은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지휘관은 선거에 의해 선출하고, 봉건사상의 지주가 되어있는 공자묘, 불사, 도관과 같은 우상을 파괴, 소각하고 군대 규율을 엄격히 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금하였다.


 

태평천국 운동은 꽝시지방에서 화중으로 진출할 때까기는 군기가 엄하여 부펴한 청 군대에게 고통받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북벌군이 청의 후원으로 온 몽고병에게 패한 뒤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난징 점령후 홍슈취안의 정치적 관심 퇴조와 더불어 내부적 부패, 암투가 시작되어 나중에는 청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는 존재로 타락해갔다. 한편 청은 그 무력의 근간인 八旗, 綠營이 무력하여 처음에는 고전하였으나 나중에 한인 의용군과 외국 군대의 원조를 얻어 이를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한인 지주는 태평천국의 토지제도에 공포를 느꼈고, 전통적으로 유교를 옹호하고 있었다.


 

이데 그들은 한인 의용군을 조직하여 '태평군'을 공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안후이성의 리홍장의 淮勇, 후난성의 청꿔판의 湘勇, 江忠勇의 楚勇이었다. 한편 상하이에 있던 유럽인들은 처음 완고한 청에 싫증을 느껴 새로운 태평천국에 대한 기대와 그의 기독교척 색채 때문에 중립 내지는 우호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유럽 열강은 태평천국의 기독교 교의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아편엄금정책을 통해 청보다 다스리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청과 텐진조약, 뻬이징조약을 맺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차츰 태도를 바꾸어 태평군이 상하이 조계를 공격한 것을 계기로 청을 원조하게 되었다.


 

즉 미국인 Ward, 영국인 Gorden은 常勝軍이란 외인 의용군을 조직하여 한인 의용군과 함께 태평군을 공격하였던 바 태평천국 운동은 戰後 15년만에 망하고 있었다. 이 태평천국 운동은 그 성격상 불명확한 점이 많은나 종래의 자연 발생적인 농민반란과는 몇가지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멸만흥한의 민족주의적 운동이란 점이고, 둘째, 비록 왜곡되기는 했어도 기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점이며, 셋째, 빈농층을 중심세력으로 농민을 결합하여 토지균분, 남녀평등 등을 내건 점 등 근대적 요소와 혁명적 의의를 정할 수 있는 점이고, 넷째, 태평군이 외국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상하이 조계를 공격한 것에서 反帝國主義的 경향을 인정할 수 있는 점이다.


 

또한 태평천국 운동이 실패하였으나 그 끼친 바 영향은 심각하고도 광범위하였다. 청은 태평천국 운동의 진압에 공을 세운 한인 지주 및 유럽 열강과 결탁하게 되었고 영국도 세포이 독립전쟁의 경험에 비추어 중국에서는 淸朝 보수정권을 존속시켜 이것을 통해서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청은 열강의 중국 착취 대행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 이 운동은 중국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를 양성시켜 대중의 힘이 신생 중국의 커다란 힘이 되게 하였으니, 신해혁명, 5·4운동도 태평천국 운동에 의해 눈뜨기 시작한 민중의 자각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2. 태평천국과 중국근대의 민중운동

1850년 이후 농민에 기반을 둔 반란들이 약 20년이 넘도록 거의 모든 중국지역을 소란에 빠지게 하였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소한 형태의 지역봉기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반란의 일반적인 원인은 중국 자체가 안고 있는 환경에서 비롯되었지만,외국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1850년에 시작되어 1864년에 종결된 태평천국운동은 양측의 영향을 받은 대대적인 근대의 민중운동 이었다. 사회의 아래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의 원인으로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인구는 1840년대에 4억으로 증가하였으나, 토지증가는 그에 따르지 못하였으며, 행정조직도 인구나 통치 영역이 팽창한 만큼 확대되지 못하였고, 그에 따라 재정수입도 만족할 정도로 증대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아편전쟁은 광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내륙 무역로에 변화를 가져와, 이곳에서 운수업에 종사하던 노동자의 실업을 낳았다. 전쟁 이후 광동연해가 영해군의 관할하에 들어 감으로써 이곳에서 종래부터 활동하던 해적들은 내하의 수로로 쫓겨 들어 갔고, 이로 인해 광동과 광서지방은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전쟁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말세가 다가올 것이란 위기감을 심어 주었고, 이렇게 생겨난 혼란과 권력의 공백 속에서 비밀결사들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것들은 대체로 상호부조나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사회의 하층민들이나 빈농, 이동상인, 운수노동자, 하급관리, 밀수업자, 그리고 향촌의 소지식인이나 이단적 종교인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화남 지방의 대표적인 비밀결사로는 18세기 말부터 존속해 온 천지회가 있었으나, 1840년 대에는 전통적 민중종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접합 시킨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비밀결사가 출현하였다.


 

배상제회는 주로 객가인(客家人)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오랜 시기에 걸쳐 화북에서 화남으로 이동하였으나,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한 채 본지인(本地人)에게 차별을 받으면서 때로는 그들과 전투를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배상제회를 주동한 대표적 인물인 홍수전 (洪秀全, 1814-1864)도 몇 차례의 과거응시 경력이 있었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광동의 객가출신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중병이 들자 환상에 빠지면서, 자신의 역할이 여호와를 대신하여 인류를 구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850년에 중국남부의 광서성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배상제회가 주동한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반란지는 이 결사가 성장한 광서성이었지만, 곧이어 주변의 하층민들을 끌어 모으면서 세력이 확장되었고, 지역상으로도 호남을 거쳐 1853년에는 화중의 중요도시인 남경을 점령하면서 이 운동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들은 공식 국호인 '태평천국'에서 보이듯이 종교와 사회, 경제, 정치면에서 중국인이 이상으로 여겨온 대동 세계를 기독교적 이념과 절충하는 방식으로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형제자매이며,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될 뿐만 아니라, 생산물도 독점될 수 없는 공산적사회체제를 규범으로 정하였다. 이 모든 원칙들은 그들이 남경에서 발표한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왕의 지위에 오른 운동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증대 시키는데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지도자들 사이에는 갈등이 증폭되었으며, 종교와 현실 정치의 구분도 모호해져 갔다. 정책의 중요 기반인 점령지내의 농촌 지배도 원할치 않았다. 지방의 신사들이 향촌을 방어하기위해 조직한 향용(鄕勇)과 청군의 공격도 태평천국 운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태평천국 이외에도, 당시의 중국사회에는 대체로 비밀결사나 반기독교운동, 반지주 투쟁, 또는 한족지배에 대한 소수 민족의 저항 등으로 민중들이 자신의 권익을 향상시키거나 외국의 침략에 대응하려고 노력하였다. 1854년에는 광동성에서 청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진개(陳開)를 중심으로 한 천지회 집단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반란은 곧이어 전성에 있던 천지회의 호응을 얻으면서 큰 세력을 떨쳤다. 또 태평천국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자, 상해 부근에 있던 천지회 계통의 소도회(小刀會) 집단도 1853년에 이에 호응하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해 부근의 현성들을 일시 점령하였다.


 

이에 비해 염(捻)집단은 황하와 양자강의 중간지대인 회하유역에서 활동한 빈농 중심의 백련교계 비밀결사로서, 태평천국의

영향을 받아 1853년부터 1868년까지 지속된 반란을 주도하였다. 이 지역은 농업에 불리한데다 행정력보다는 부호에 의한 지배가 압도적이었고, 대운하를 통한 소금밀매가 성행한 곳이었다. 또아리를 뜻하는 염들은 부상, 부농, 관청 등을 공격하면서 이에서 얻은 재물을 수호전 방식으로 빈민에게 나누어 주던 향촌사회에 뿌리를 박은 조직이었다.


 



이상의 비밀결사적 민중운동이 중국사회 자체가 안고 있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 등의 문제에서 발단된 것이라고 한다면, 변경지역에 있던 소수민족의 반란은 대체로 한인과의 갈등 속에서 성장하였고, 1860년 이후 중국 사회에 만연하게 된 반기독교 사건들, 즉 교안(敎案)은 서구 침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854년에 중국 남서부의 운남에서 일어난 회족의 반란은 회족과 한족과의 은광 쟁탈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뒤이은 56년의 반란에서 회족 전사 두문수는 운남의 성도인 대리를 새로운 회교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1854년에는 운남접경의 귀주에서 또 다른 소수민족인 묘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1862년에는 중국서북부의 섬서와 감숙지방에서는 과중한 세금부과와 자연재해 및 한족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과 태평천국군의 섬서 진입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여 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런 반란들은 대체로 한족지배에 대한 소수민족의 저항이라는 특색이 있다.



이에 반해 반기독교 운동은 주로 한인 지식인들과 민중들이 외국인 선교사 및 중국인 기독교도를 공격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천진조약과 북경조약에서 기독교의 포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음은 이미 기술하였지만, 서양인 선교사에 대한 반감은 그들이 중국의 전통문화와 질서를 이해하기 보다는, 파괴하려고 한다는데 있었다. 확실히 명대의 마테오 리치에 비교한다면, 근대의 서양 기독교는 중국문화를 멸시하고,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 사대부들이 이에 반발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반기독교 운동은 1860년대부터 시작되어 189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고, 의화단 운동을 통해 대규모로 폭발되었다. 그 내용은서양 선교사의 살해와 교회의 방화, 중국인 기독교도의 공격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국가들은 무력으로 청정부에 책임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였고, 청정부는 이에 응하였다.


 

종교의 다원화, 서양 문물 소개, 사회사업 등에부분적으로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독교가 중국을 이롭게 한다기보다는 침략의 선봉으로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양자에게 모두 불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19세기 중엽 이후의 민중운동은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한편으로, 소수민족의 한족에 대한, 또 한인의 서구열강에 대한원초적 민족주의를 발효시켰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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