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story/역사 문학 그림'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07.12.17 :: 문화대혁명
  2. 2007.12.17 :: 양무운동
  3. 2007.12.17 :: 태평천국운동
  4. 2007.12.17 :: 5·4애국운동
  5. 2007.12.17 ::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 배경,이념
  6. 2007.12.17 :: 아편전쟁

문화대혁명

가지 측면〕 문화대혁명은 일관하여 중국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적인 성질과 당내투쟁의 대중운동화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측면 3가지가 있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문화대혁명 제1단계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린뱌오〔林彪〕를 당부주석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삼는 새로운 정치적 지도권을 강행적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린뱌오를 중심으로 한 인민해방군의 주도에 의하지 않는 한,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이른바 실권파 세력으로부터의 탈권(奪權)이 불가능했다는 것도 나타냈으며, 여기에 병영(兵營) 체제화한 중국 권력중추의 정치위기의 내부모순이 나타났던 것이다. 71년 9월 일어난 충격적 린뱌오이변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때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문예정풍(文藝整風)>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종래의 문화나 가치의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그 발전단계에서 인류문화유산을 어떻게 계승하여 나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 점에서 중국은 자기 문명사를 철저하게 고쳐 쓰려는 듯했으나 <마오쩌둥사상>의 절대화는 사상이나 문화를 본래적인 생명에서가 아니라,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로의 기능이라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빈곤의 유토피아>를 추구하여 중국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마오쩌둥의 의식에는 도시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새로운 계층화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한편 절대적인 마오쩌둥 가부장체제 아래에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단계에 중국 민중의 저항을 받고 중국전통사회의 두꺼운 벽에 부딪쳐 마오쩌둥의 이상은 마침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75년 여름의 항저우사건〔杭州事件〕, 76년 4월의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 정치에 대한 민중의 반란이었고, 같은해 10월 베이징정변〔北京政變〕으로 마오쩌둥 측근인 <사인방(四人幇)>은 실각되고 말았다.



〔전개과정〕 마오쩌둥은 장칭〔江靑〕·장춘차오〔張春橋〕 등 이른바 <장칭문예살롱> 인사들이 모였던 상하이에서 문학대혁명의 개막을 알리고, 65년 11월 10일 젊은 문예비평가 야오원위안〔姚文元;당시 상하이시당위원회 서기〕은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역사학자로서 이름난 베이징시 부시장인 우한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시작했다. 우한 비판은 베이징의 지도적 지식인들, 이른바 <삼가촌(三家村)그룹>에 대한 비판 쪽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윽고 당베이징시당위원회가 실권파 아성이라고 격렬히 비판되었고, 펑전〔彭眞〕·베이징시장(당베이징시 위원회 제1서기) 등이 일제히 규탄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66년 4월 상순, 베이징시 당위원회가 개편되었고, 4월 18일자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 사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처음 공식규명했다. 이어서 5월 16일 문화대혁명의 신호나팔 구실을 했던 당 중앙 <통지>를 공포하고, 당 중앙 문혁소조(조장 陳伯達, 제1부조장 장칭)를 설치했다. 이윽고 5월 25일 베이징대학의 젊은 여성교사 녜위안츠가 교장 루핑〔陵平〕 등을 <삼가촌그룹>의 일파라고 격렬히 비난한 대자보를 붙였다. 6월 1일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전국에 방송토록 지시하고, 이를 <20세기 60년대 중국의 파리고뮌 선언서>라고 찬양했다. 6월 3일 펑전 등의 해임과 베이징시당위원회의 개편을 발표하고, 실권파 아성의 붕괴를 알림과 동시에 <마오쩌둥사상>을 견지해 온 린뱌오의 공적이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11중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마오쩌둥은 회기중이었던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자―나의 대자보>를 스스로 붙였고, 8월 8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66년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제1회 100만명집회에 모였던 홍위병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가두진출하여 <마오쩌둥사상>을 찬양하면서 격렬한 구문화(舊文化) 파괴행동을 벌였다. 문화대혁명은 홍위병 중심의 가두투쟁단계에서 실권파 타도를 위한 탈권투쟁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실권파의 저항도 끈질겨 각지에서 탈권과 반탈권 사이의 무력투쟁이 계속되었을 때, 린뱌오휘하의 인민해방군은 67년 1월 23일 탈권투쟁에 대한 군(軍)의 전면개입을 결정했다. <1월혁명>이라는 상하이의 탈권투쟁에서 상하이의 반란파는 코뮌형 권력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으나, 마오쩌둥 등 당 중앙은 이 코뮌구상을 갑자기 눌러버렸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한 전환점이 되었고, 그 뒤 마오쩌둥·린뱌오주류파는 혁명파의 <대연합>에 의한 탈권을 호소하며 혁명간부, 군(軍) 대표, 혁명적 대중대표로 이루어진 <삼결합(三結合)>의 혁명위원회를 수립하라고 호소했고, 혁명위원회는 68년 9월까지 전국의 모든 1급 행정구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대회(약칭 9전대회)가 69년 4월에, 56년의 8전대회 이래 13년만에 열렸다. 이 9전대회는 문화대혁명이 위로부터의 당재건이라는 큰 전환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마오쩌둥의 비길 데 없는 권위를 확립하고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의식이었다. 그 동안 마오쩌둥 측근으로 문혁소조 조장이었던 천보다〔陳伯達〕는 70년 8~9월 제 9 기 2중전회에서 <대야심가·음모가>라 하여 실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린뱌오이변이었다. 린뱌오이변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나, 73년 7월 중국당국은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몽골에서 추락사하였다고 발표했다. 문화대혁명의 한 중대한 결말이 된 린뱌오이변이라는 심각한 사건 후인 73년 8월 중국공산당 10전대회가 열렸다. 10전대회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정치보고, 왕훙원〔王洪文〕의 당규약개정 보고를 채택한 뒤에 새로운 중앙 지도부를 선출했다. 중앙위원회 주석에 마오쩌둥을, 부주석에 9전대회 때 부주석이 린뱌오 단 한 사람이었던 데 반해 저우언라이·왕훙원·캉성〔康生〕·예젠잉〔葉劍英〕·리더성〔李德生〕 등 5명을 선출했다. 이 10전대회는 린뱌오 처단과 대(對)소련 비난을 거당적으로 실시한 의식을 나타냈으나, <마오쩌둥체제하의 비(非)마오쩌둥화>와 탈문화대혁명을 지향하는 <조류(潮流)>의 크기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10전대회 전후에 일어난 공자비판(孔子批判)·시황제예찬(始皇帝禮讚) 운동은 이윽고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되어 이른바 <반조류>의 반격이 일어나 마오쩌둥체제 말기의 내부각축은 차츰 치열해갔다. 75년 여름에 일어난 항저우사건은 공장노동자의 임금인상요구동맹파업이 몰고 온 항저우 일대의 혼란을 군대가 제압한 사건이었고, <빈곤의 유토피아>를 강제해왔던 마오쩌둥체제의 말기적인 사회적 모순을 안으로부터 노정시킨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조류>와 <반조류>가 내부적으로 각축하는 가운데, 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총리는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읽었던 덩샤오핑부총리는 감히 <4개의 현대화>노선 계승을 문혁파 지도자의 면전에서 서약하여 문혁파들을 크게 초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주자파(走資派)> 비판운동이 76년 2월 초순부터 일제히 전개되었다. 2월 초순에는 문혁파 비(非)상하이그룹의 화궈펑〔華國鋒〕이 국무원총리대행으로 마오쩌둥의 지명을 받아 일약 부각되었으나, 이러한 <역류>에 대한 대중적 항의로 일어난 것이 천안문사건이었다. 당 중앙은 이 사건을 <반혁명>사건으로 단죄하고 덩샤오핑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켰으나, 후에 천안문사건이 재평가되었을 때에는 <위대한 4·5운동>으로 찬양되었듯이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체제하의 대중반란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중국의 권력중추는 마오쩌둥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후계권력 싸움이 마오쩌둥 측근체제 내부에서 격화되었다. 마오쩌둥의 죽음을 결정적인 계기로 하여 10월 7일에는 <기정방침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마오쩌둥의 유훈(遺訓)을 내걸고, 권력계승권을 재빨리 주장했던 문혁파 상하이 그룹인 <사인방>이 모두 실각하는 충격적인 베이징정변과 함께 화궈펑체제가 일거에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화궈펑은 마오쩌둥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당신이 한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또 하나의 마오쩌둥 유훈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그림자>는 이윽고 중국내정 전체의 마오쩌둥화가 진전됨에 따라 화궈펑의 정치적 장래를 흐리게 하여 77년 7월에는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재부활되었다. 같은 해 8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전대회에서는 새로운 당규약 가운데 <4개의 현대화>가 명기(明記)되었고, 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통일적인 국가목표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은 오늘날의 <4개의 현대화>라는 노선(路線)으로 크게 선회하였다.



〔오늘날의 평가〕중국은 79년 10월 1일, 건국 30주년을 맞아 그 축하집회에서 예젠잉이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에 의한 <건국 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이 당의 결의에 의해 정식으로 부인되어 류사오치를 비롯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타도된 지도자 모두를 복귀 또는 명예회복시키는 한편, 문혁파는 모두 실추하여 비마오쩌둥화가 진전되었다.

1) <해서파관> 비판

모택동과 실권파 간의 대립 : 앞에서도 누차 설명한 바 있지만 문혁의 배경에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계급투쟁론과 권력에 대한 탈권투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중국 역사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엄청난 재앙만 가져다 준 것 같다.

 

중국은 1953년에 시작한 제1차 5개년경제계획에서 농촌지역은 오히려 희생을 강요 받았고 또 소련과의 불화로 인하여 경제건설에 문제점을 낳았다. 1958년이 되어 모택동은 다시 한번 자력갱생의 대약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잘살아 보자고 시작한 대약진운동이 3년간에 걸쳐서 오히려 대실패를 가져와 인민을 기아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결국 경제건설에는 이를 조정해야 하는 조정국면을 갖게 되고 이에 모택동은 그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의 자리를 유소기에게 넘겨주고 제2선으로 물러났다. 권좌를 물려 주어야 하고 정책방향도 조정국면이라는 수정주의 쪽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파와 유소기,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실권파가 형성되어 정치상에 이중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대약진운동이 실패하였을 때 당중앙회의에서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팽덕회는 그침없이 모택동에게 비판을 가하였다. 모택동에게 그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팽덕회는 오히려 모택동 수구세력에게 밀려 모든 직책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실권파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과감하게 모택동에게 도전하면서 모택동을 공격하고 비판을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신 모택동은 유소기에게 넘겨진 권력을 되찾기 위하여 또다시 새로운 정풍운동을 일으켜야 했을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붓고 있을 당시, 유소기와 등소평과 같은 조정국면의 정책을 지지하던 실권파 지식인들도 나름대로 문예활동을 하면서 유소기를 지지하고 모택동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문예비판 : 당시 북경시의 부시장이면서 역사학자이었던 오함은 경극의 희극본인 <해서파관>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썼다.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명대 말기의 황제인 가정제가 포악하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호부주사였던 해서가 정치와 인민의 고통을 고려하여 가정제에게 직접 정사를 잘 살펴달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의 글속에는 지주들이 수탈한 토지는 반드시 일반백성에게로 돌려 주어야 하며 군주의 전제주의적 독재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정황제는 노하여 해서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킬 것을 준비하였으나 황제가 갑자기 죽게 되자 화를 면하고 다음황제는 융경황제가 등극하여 민심에 따라 해서를 사면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희곡의 내용에는 역사가 말해주는 어떤 암시가 들어있다. 아마도 역사학자인 오함도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보고 자기의 뜻을 표시한 것이라고도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961년에 발표한 오함의 <해서파관>은 명대의 청렴한 관리 해서가 관료들의 모함을 받고 면직되었다는 사실을 빗대어, 이는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 강한 반발을 보인 당시의 국방장관 팽덕회를 숙청시킨 일을 해서의 경우를 빌어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주의 토지수탈이나 황제의 독재성에 대해서는 당시 모택동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성과 토지의 인민공사화로의 집단농장화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에 빗대어 은근히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더 이상 북경에서는 사회주의 계급투쟁과 수정주의 타도, 그리고 자기의 탈권운동을 진행시킬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상해로 빠져 나갔다. 드디어 1965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모택동의 열성적인 추종자인 상해의 극좌파 작가인 오문원이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의 비호를 받아 1961년에 발표되었던 오함의 희곡 <해서파관>을 포적으로 삼아 1965년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은 문예비평에서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약 10여년 동안 혼란을 가져올 문화대혁명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1965년 요문원의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은 상해의 문회보 신문에 실어 오함과 그 내용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인민공사를 비방하며 지주를 옹호하고 무산계급을 반대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모택동의 무산계급 혁명노선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2) 문화대혁명의 시작

문예비판의 확대 : 오함은 당시 북경 부시장이었고 북경시 당위원회와 중앙당 선전부 위원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탁과 요말사와 함께 삼가촌(三家村)이라 불리면서 언론계에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북경시장인 팽진과 육정일 등과 연결되어 당최고 지도자인 유소기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결국 모택동에 의한 문예비평의 음모는 결국 정치적 비판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권파 측에서는 요문원의 오함에 대한 비판 논문이 실리자 발빠르게 오함으로 하여금 자아비판을 하도록 하여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 불똥을 다시 경극 작품들을 비판하고 경극정책에까지 비판을 가하는 등 문에비평을 확대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오함에 이어 전한에 까지 비판이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실권파 당중앙정부는 1966년 2월에 들면서 ‘문화혁명5인소조’라는 조직을 만들고 여기에서 ‘2월제강’을 작성하여 문예비평활동을 무마시키려 하였다. 비록 ‘2월제강’에서 표현한 내용들이 문예비평에 대한 학술적 논쟁을 잘 수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가열된 문예정풍운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해 3월이 되자 또다시 북경대학 역사교수 전백찬, 중국과학원 원장 곽말약까지 비판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모택동 부인 강청은 상해에서 국방부장관 임표와 결탁을 하여 상해에서 군부대문예좌담회를 열어 반사회주의 문예활동은 청산시켜야 한다고 선언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과 그 무리들은 실권파의 ‘2월제강’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모택동의 깃발앞에서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소리높여 외쳤다.

 

이에 앞서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임표는 모택동의 지지를 받아 군내부에 임표의 반대파이며 문혁5인소조의 위원이었던 총참모총장 나사경을 군권을 휘둘러 반당활동을 하고있다는 죄목을 걸어 체포하였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모택동은 임표계열의 인민해방군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소기, 등소평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권력투쟁을 착착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다.

 

5.16 통지 : 1966년 5월 16일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는데 그기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라고 하는 이른바 <5.16통지>가 채택되었다. 이 통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결정되었다. 첫째, ‘2월제강’의 내용과 ‘문화혁명5인소조’를 폐지하고 새로이 ‘문화혁명소조’를 결성한다. 둘째,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계속 진행한다. 셋째, 그에 따라 공산당, 정치권, 군사, 그리고 문예계 전반을 통하여 반사회주의 자산계급의 인물들을 색출하여 맹렬히 비판할 것을 결정하였다. 말하자면 문화대혁명의 권력투쟁을 시작하겠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5.16통지문에서 나타난 결정적인 내용은 ‘2월제강’에서 보인 문화혁명은 단순히 학술영역에서만 투쟁을 하자고 한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서 이 통지문은 북경시위원회와 당실권파에게 결정적인 공격을 주기위해서는 문예비평운동의 수준에서 정치투쟁의 수준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5.16통지문은 곧 전국으로 폭풍처럼 번져 나갔다. 모택동은 반혁명 수정분자가 정권을 탈취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브르조아 독재로 바꾸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파괴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동하면서 대중운동으로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문화대혁명의 권력투쟁바람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북경대학의 대자보 : 북경대학 철학과 강사이며 모택동의 추종자였던 섭원재는 이미 학교의 공산당위원회를 공격한 바가 있어 엄중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팽진 북경시장이나 학교의 당위원회에 대하여 강한 불만이 있었다. 그는 ‘5.16통지문’의 소식을 듣고 드디어 학생 7명과 함께 학교의 당위원회를 공격하는 대자보(大字報)를 섰다.

 

특히 북경대학의 총장은 ‘5.16통지문’이 채택된지도 모르고 또 학생의 불법행위를 금지시키고 있었다. 반감을 품은 학생들은 ‘대학은 과연 문화대혁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곳인가’ 라는 제목으로 대자보를 붙이고 학생들을 선동하였다.

 

대자보에서 말하기를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홍기를 쳐들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을 단호하게 처단하자고 선동하였다. 북경대학의 섭원재의 대자보가 발표된 이후 전국의 각 대학에서는 서로 앞을 다투어 학교의 당위원회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하였다.

 

5.16통지문이 발표되면서 그 내용은 대학교로 전파되었고 그것은 곧 바로 대자보의 형태로 대학생들을 선동하게 되었다. 그것은 몇일 사이에 확대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것은 당내의 투쟁적인 문제가 전 사회로 옮겨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5.16통지문에 이어 드디어 5월 29일에는 북경 청화대학 부속중학에서는 홍위병이 탄생하였다.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들은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을 위한 전위적인 대중조직으로 그 전의 문예정풍운동을 정치적인 계급투쟁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홍위병 운동의 격발 : 한편 팽진의 해임과 북경의 당위원회의 개조가 보고되면서 실권파의 붕괴가 예고되었다. 동시에 모택동 사상을 견지해 왔던 임표에 대한 공적은 크게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실권파에 대한 모택동과 임표의 공세가 계속되는 속에 유소기와 등소평들도 공작조를 조직하여 정항과 방위를 시도하였다. 그러는 사이 당내의 권력투쟁은 더욱 대중운동으로 격화되어 갔다. 모택동이 홍위병의 설립을 지지하는 담화문이 발표되자 각 대학의 홍위병의 활동은 대학내의 당위원회와 권위있는 교사들에 대한 공공연한 조반(造反)이 확대되어 갔다.

 

6월달이 되자 전국의 각 대학에서는 홍위병이 보편적으로 조직되어 갔다. 8월이 되어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홍위병들의 시위가 출현하게 되어 세계를 경악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미 홍위병이 조직화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배후에는 모택동이 있었다. 모택동은 홍위병들의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즉 저항하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슬로건을 고무하고 새로운 것을 위하여 과거를 파괴시켜야 한다고 부르짖는 홍위병들을 찬양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66년 8월 그 때 중국공산당 8기 11중전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모택동은 노골적으로 ‘사령부를 포격하라’고 하는 대자보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신단계라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走資派)를 몰아내는 것이 당면의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계급투쟁을 하라고 선동하였다.

 

8월 이후 중국은 전국적으로 열광적인 홍위병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무쟁투쟁도 나타나고 있었다. 모택동은 홍위병의 과격한 행동에 대하여 자제해 줄 것을 호소해야 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당은 실권파의 최고지도자 타도에게만 투쟁의 초점을 좁히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탈권투쟁 : 1966년 년말이 되면서 홍위병들의 운동은 질적인 전환을 하면서 유소기, 등소평 등의 당정치 지도자들을 지명하면서 비판과 공격을 시작하는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문제의 소재는 명확해 졌다. 문화대혁명은 홍위병중심의 가두투쟁에서 실권파타도라는 탈권투쟁으로 질적인 전환을 하고 있었다.

 

실권파의 저항도 완강하여 각지에서 탈권과 반탈권의 무장투쟁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에 임표는 임표의 통솔하에 있는 인민해방군을 모택동의 요청에 따라 탈권투쟁에 대한 군대의 전면적인 개입을 선언하였다.

 

탈권투쟁의 과정에서 본격적이고 계통적으로 유소기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유소기는 1968년 10월 중국공산당 8기 12중전회에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당으로부터 제명되어 중국의 정치적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문혁의 수습과 임표 : 1968년에서부터 전국 각지에서 혁명위원회가 하나하나 새로 발족하기 시작하였다. 문화대혁명은 각 지역의 혁명위원회를 통하여 서서히 수습되어 가는 기미를 보였다. 문화대혁명이 수습단계에 들면서 당중앙은 당재건을 수립하는데는 반드시 모택동 사상에 근거하여 건설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1969년 4월 제9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고 문화대혁명을 통한 당의 재건은 우로부터 장악한다고 전제하고 모택동의 막강한 권력의 장악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모택동의 권력장악에 따라 모택동은 임표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고 사회주의 전진을 위하여 모택동의 친밀한 동지 임표를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규정하였다. 문화대혁명에서 보인 군의 공헌과 협력으로 정치적 위기를 벗어난 모택동은 그 대가로서 임표에게 권력이양을 약속했던 것이다.

 

좌파의 퇴조와 주은래 : 임표는 이 제9차 전국인민대회에서 정치보고를 하였는데 그 내용중에 대외관계문제에 있어서 그는 사회제국주의(소련을 겨냥)와 대결할 것을 강조하면서 침략전쟁에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수습하려는 과정에서 임표와 같은 중소분쟁을 야기시키는 그리고 대소강경노선은 중국의 국가적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 1969년 여름에는 신강지구에서 중소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때 주은래는 중국의 내정과 외정에 관여하면서 중소의 화해 또는 문혁으로의 조용한 탈피를 추진하여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임표사건과 중미의 접근 : 우리는 여기서 중국내에 그 동안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원만한 수습작업이 진행될 것을 희망하는 집단과 문혁의 성과를 자기의 권력장악으로 파악하는 정치집단 간에 간격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권력장악에 따른 강경노선의 주장과 문혁을 탈피하여 조정국면을 유지하려는 온건파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 듯하였다. 다시 말하면 군대의 대두와 당관료, 행정관료의 사이에 정치안정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암투가 있었던 듯 하였다.

 

그것은 임표사건으로 끝이 났다. 모택동의 후계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임표가 1972년 7월 죽었다는 것이다. 임표사건은 아직도 많은 의문이 있다. 중국당국은 임표가 모택동 주석을 암살하려다 실패로 인하여 몽고로 도주하다가 비행기 사고에 의하여 추락사하였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문혁의 조정국면 앞에서 주은래등의 실무파 관료들의 반대, 구실권파 세력들의 반대, 그리고 임표의 대두를 싫어하는 군부세력들 등의 연합세력 앞에 결과적으로 독재적 강경노선은 괴멸된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해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주은래는 군의 대두를 억제하고 동시에 강대국과의 충돌을 피하는 의미에서 1969년 7월에 미국이 중국에 대하여 접근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1971년 7월 닉슨 미국대통령의 방중계획에 대한 발표는 이른바 ‘닉슨 쇼크’로서 당시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것은 중국으로 보아서는 문혁에 대한 조정국면으로서 군의 등장을 억제시킨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결과적으로 임표사건은 문혁의 심각한 모순을 나타낸 것으로서 중국의 권력투쟁으로서의 문화대혁명은 참으로 허망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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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

군사공장 : 양식병기의 구입 또는 열강의 기술도입에 의한 군사공장 설립 등은 양무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중심 내용이다. 1862년부터 시작하여 총, 총알, 대포, 포탄, 부수기계 생산공장을 설치하였다. 특히 1865년 상해에 설립된 강남제조총국은 외국의 기계와 기술을 도입하여 건설된 것으로 양무운동시기에 있어서의 최대의 규모였다. 또 무기제조에 부수되는 사업으로는 조선공장, 광공업, 군사기술에 대한 외국서적 번역출판사업 등이 있었다.

 

공장설립의 내용으로 보면 첫째, 금능기기국이 있다. 1865년에 이홍장이 남경에 설치하였다. 영국인에 의하여 건설되었고, 무기 방면에서는 전국의 최고였다. 제품은 이홍장의 회군의 장비에 공급되었다. 둘째, 복주선정국이 있다. 1866년에 죄종당이 복주에 건설하였고 프랑스인이 지도하였다. 해안방비와 해운을 위한 선박을 건조하였다. 셋째, 천진기기국이 있다. 양무운동이 한인관료 수중에 장악되는 것에 대항하여 만주인 중심으로 건설된 공장이다. 그러나 1870년 이홍장이 직예총독이 되면서 이를 확대하고 정비하여 북양군대의 무기를 공급하였다.

 

양무기업 : 1880년대 들면서 군사사업에만 한정되었던 양무운동을 확대하여 상무진흥의 양무기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적, 광산, 방직, 기선, 전신전보, 제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군사부분은 완전히 국영으로서 관판기업이지만 양무기업 속에서는 민간으로부터 자본투자를 구하는 관독상판기업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홍장이 1872년 상해에 설치한 ‘윤선초상국’과 ‘상해기기직포국’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의 실권은 어디까지나 이홍장 계열의 관료에 장악되어 개인의 축재수단이 되었다.

 

어쨓든 1870년대 이후부터 양무운동의 성격은 군사부분에서 상공업활동에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가 일어났던 이유는 군사부문의 유지를 위해서 또 양무파 각 집단의 사병적 군사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금의 자금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군사공장의 운영은 사실상 비생산적이고 비영리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익을 낳을 수 있는 부분으로 진출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보이는 또 하나의 현상은 민간주도의 상공업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당시 상황 속에서 성장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관독상판의 영향 하에서 순수 상인의 발생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자본계층에서의 민권운동이 보이게 되고 관독상판에 대한 비판도 나타나며 정치불만도 표시하였다. 이점은 당시 주로 상해의 지식계층을 중심으로 나타나며 사상적으로는 변법운동으로 가는 최초의 모습이 되었다.


 

운동의 파산 : 양무운동의 파산은 1885년 청불전쟁을 전후하여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미 선진적 지식인 중에서 양무운동을 넘어 변법론을 제기하는 인물이 나오고 있었다. 양무파 관료 중에 마건충 등은 유명한 예이다.

 

마건충은 민족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금제의 폐지를 주장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민간상업과 민간기업을 보호육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왕도는 양무운동이 외형적으로는 처세가 강하나 실제로는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사실상 양무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파산을 선고하게 한 것은 청일전쟁이다. 양무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찾아보면 양무파의 자강에는 열강침략에 대항한다는 대외적 자강과 국내적으로 국내반란을 진압한다는 대내적 자강이 있다.

 

대내적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하나 대외적 자강은 사실상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전쟁에 패배함으로서 양무운동은 실패의 결과만 낳은 것이다. 이홍장의 정책으로서 양보와 타협과 후퇴라는 아주 애매모호한 외교정책이 파탄을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실패의 원인 : 양무운동의 실패를 위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는 보면 양무운동의 목표가 실제로는 민중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데 있었다고 하겠다. 오히려 운동은 열강에 의존하고 있고, 기계, 자재, 기술 등도 대부분 열강에 의존하여 진행되고 있었다. 양무파 관료들이 정치내부에서 발언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양무기업에서도 특권의 혜택을 가지고 있어 민간기업의 발전이 억제되는 경제적 독점현상도 보이고 있었다.

 

양무이론이 애매하다는 점에서도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국사회의 가치기준은 중국의 학술과 전통에 두고 다만 실용으로서 서양을 수용하여 중국의 가치를 보강하는데 기여하면 된다는 중체서용의 사고이었다. 때문에 그 결과로서 군사적 측면에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즉 청조지배체제를 보강하는 수단으로서 서양을 보았다는 점이다

학당설립과 유학생 파견 : 최초의 서양식 학교는 1862년 북경에 설립된 경사동문관이었다. 외국어에 익숙한 인물을 배양하기 위한 것으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이에 따라 양무운동 추진을 위한 기술요원을 양성하기 위해서 학당이 각지에서 설치되었다. 외국어 및 군사기술의 습득을 위한 목적으로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맞추어 구미 유학생의 파견이 시작되었다.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으로 파견되었다. 문제는 해외유학 자체가 실용주의에서 나왔기 때문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도 양무학교 졸업생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학생의 인물 중에는 중국의 근대화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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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운동

태평천국 운동은 청말 부패한 내정과 외래 자본주의 침입으로 빚어진 사회 경제적 혼란 가운데 일어난 농민운동의하나였다. 이 운동의 지도자 홍슈취안은 꽝뚱성의 客家 출신으로 '과거 낙방생'이었다. 그는 아편전쟁의 패전을 직접 체험한 뒤『勸世良言』이란 책을 읽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上帝會란 기독교적 비밀결사를 만들어 1850년 滅滿興漢의 치를 내걸고 꽝시성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만주 풍속인 변발을 버리고 중국 고유의 장발을 하였기 때문에 長髮賊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소규모의 반란이었으나 빈농, 비적, 유민과 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지식인의 지지를 얻어 불과 6년만에 양쯔강 이남을 거의 점령하고 1853년에는 난징을 함람시켜 이를 天京이라 고치고 태평천국을 세웠다. 홍슈취안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워 天朝田畝制度를 공포하여 경작자에게 토지를 균등히 나누어주고, 지세를 감면하였으며, '전족', 노예 매매, 아편 흡연을 비롯하여 매매혼, 축접, 매춘, 음주, 도박까지 嚴禁하고 남녀평등권을 인정하여 직업상 같은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지휘관은 선거에 의해 선출하고, 봉건사상의 지주가 되어있는 공자묘, 불사, 도관과 같은 우상을 파괴, 소각하고 군대 규율을 엄격히 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금하였다.


 

태평천국 운동은 꽝시지방에서 화중으로 진출할 때까기는 군기가 엄하여 부펴한 청 군대에게 고통받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북벌군이 청의 후원으로 온 몽고병에게 패한 뒤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난징 점령후 홍슈취안의 정치적 관심 퇴조와 더불어 내부적 부패, 암투가 시작되어 나중에는 청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는 존재로 타락해갔다. 한편 청은 그 무력의 근간인 八旗, 綠營이 무력하여 처음에는 고전하였으나 나중에 한인 의용군과 외국 군대의 원조를 얻어 이를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한인 지주는 태평천국의 토지제도에 공포를 느꼈고, 전통적으로 유교를 옹호하고 있었다.


 

이데 그들은 한인 의용군을 조직하여 '태평군'을 공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안후이성의 리홍장의 淮勇, 후난성의 청꿔판의 湘勇, 江忠勇의 楚勇이었다. 한편 상하이에 있던 유럽인들은 처음 완고한 청에 싫증을 느껴 새로운 태평천국에 대한 기대와 그의 기독교척 색채 때문에 중립 내지는 우호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유럽 열강은 태평천국의 기독교 교의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아편엄금정책을 통해 청보다 다스리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청과 텐진조약, 뻬이징조약을 맺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차츰 태도를 바꾸어 태평군이 상하이 조계를 공격한 것을 계기로 청을 원조하게 되었다.


 

즉 미국인 Ward, 영국인 Gorden은 常勝軍이란 외인 의용군을 조직하여 한인 의용군과 함께 태평군을 공격하였던 바 태평천국 운동은 戰後 15년만에 망하고 있었다. 이 태평천국 운동은 그 성격상 불명확한 점이 많은나 종래의 자연 발생적인 농민반란과는 몇가지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멸만흥한의 민족주의적 운동이란 점이고, 둘째, 비록 왜곡되기는 했어도 기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점이며, 셋째, 빈농층을 중심세력으로 농민을 결합하여 토지균분, 남녀평등 등을 내건 점 등 근대적 요소와 혁명적 의의를 정할 수 있는 점이고, 넷째, 태평군이 외국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상하이 조계를 공격한 것에서 反帝國主義的 경향을 인정할 수 있는 점이다.


 

또한 태평천국 운동이 실패하였으나 그 끼친 바 영향은 심각하고도 광범위하였다. 청은 태평천국 운동의 진압에 공을 세운 한인 지주 및 유럽 열강과 결탁하게 되었고 영국도 세포이 독립전쟁의 경험에 비추어 중국에서는 淸朝 보수정권을 존속시켜 이것을 통해서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청은 열강의 중국 착취 대행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 이 운동은 중국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를 양성시켜 대중의 힘이 신생 중국의 커다란 힘이 되게 하였으니, 신해혁명, 5·4운동도 태평천국 운동에 의해 눈뜨기 시작한 민중의 자각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2. 태평천국과 중국근대의 민중운동

1850년 이후 농민에 기반을 둔 반란들이 약 20년이 넘도록 거의 모든 중국지역을 소란에 빠지게 하였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소한 형태의 지역봉기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반란의 일반적인 원인은 중국 자체가 안고 있는 환경에서 비롯되었지만,외국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1850년에 시작되어 1864년에 종결된 태평천국운동은 양측의 영향을 받은 대대적인 근대의 민중운동 이었다. 사회의 아래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의 원인으로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인구는 1840년대에 4억으로 증가하였으나, 토지증가는 그에 따르지 못하였으며, 행정조직도 인구나 통치 영역이 팽창한 만큼 확대되지 못하였고, 그에 따라 재정수입도 만족할 정도로 증대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아편전쟁은 광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내륙 무역로에 변화를 가져와, 이곳에서 운수업에 종사하던 노동자의 실업을 낳았다. 전쟁 이후 광동연해가 영해군의 관할하에 들어 감으로써 이곳에서 종래부터 활동하던 해적들은 내하의 수로로 쫓겨 들어 갔고, 이로 인해 광동과 광서지방은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전쟁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말세가 다가올 것이란 위기감을 심어 주었고, 이렇게 생겨난 혼란과 권력의 공백 속에서 비밀결사들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것들은 대체로 상호부조나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사회의 하층민들이나 빈농, 이동상인, 운수노동자, 하급관리, 밀수업자, 그리고 향촌의 소지식인이나 이단적 종교인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화남 지방의 대표적인 비밀결사로는 18세기 말부터 존속해 온 천지회가 있었으나, 1840년 대에는 전통적 민중종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접합 시킨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비밀결사가 출현하였다.


 

배상제회는 주로 객가인(客家人)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오랜 시기에 걸쳐 화북에서 화남으로 이동하였으나,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한 채 본지인(本地人)에게 차별을 받으면서 때로는 그들과 전투를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배상제회를 주동한 대표적 인물인 홍수전 (洪秀全, 1814-1864)도 몇 차례의 과거응시 경력이 있었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광동의 객가출신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중병이 들자 환상에 빠지면서, 자신의 역할이 여호와를 대신하여 인류를 구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850년에 중국남부의 광서성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배상제회가 주동한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반란지는 이 결사가 성장한 광서성이었지만, 곧이어 주변의 하층민들을 끌어 모으면서 세력이 확장되었고, 지역상으로도 호남을 거쳐 1853년에는 화중의 중요도시인 남경을 점령하면서 이 운동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들은 공식 국호인 '태평천국'에서 보이듯이 종교와 사회, 경제, 정치면에서 중국인이 이상으로 여겨온 대동 세계를 기독교적 이념과 절충하는 방식으로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형제자매이며,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될 뿐만 아니라, 생산물도 독점될 수 없는 공산적사회체제를 규범으로 정하였다. 이 모든 원칙들은 그들이 남경에서 발표한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왕의 지위에 오른 운동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증대 시키는데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지도자들 사이에는 갈등이 증폭되었으며, 종교와 현실 정치의 구분도 모호해져 갔다. 정책의 중요 기반인 점령지내의 농촌 지배도 원할치 않았다. 지방의 신사들이 향촌을 방어하기위해 조직한 향용(鄕勇)과 청군의 공격도 태평천국 운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태평천국 이외에도, 당시의 중국사회에는 대체로 비밀결사나 반기독교운동, 반지주 투쟁, 또는 한족지배에 대한 소수 민족의 저항 등으로 민중들이 자신의 권익을 향상시키거나 외국의 침략에 대응하려고 노력하였다. 1854년에는 광동성에서 청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진개(陳開)를 중심으로 한 천지회 집단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반란은 곧이어 전성에 있던 천지회의 호응을 얻으면서 큰 세력을 떨쳤다. 또 태평천국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자, 상해 부근에 있던 천지회 계통의 소도회(小刀會) 집단도 1853년에 이에 호응하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해 부근의 현성들을 일시 점령하였다.


 

이에 비해 염(捻)집단은 황하와 양자강의 중간지대인 회하유역에서 활동한 빈농 중심의 백련교계 비밀결사로서, 태평천국의

영향을 받아 1853년부터 1868년까지 지속된 반란을 주도하였다. 이 지역은 농업에 불리한데다 행정력보다는 부호에 의한 지배가 압도적이었고, 대운하를 통한 소금밀매가 성행한 곳이었다. 또아리를 뜻하는 염들은 부상, 부농, 관청 등을 공격하면서 이에서 얻은 재물을 수호전 방식으로 빈민에게 나누어 주던 향촌사회에 뿌리를 박은 조직이었다.


 



이상의 비밀결사적 민중운동이 중국사회 자체가 안고 있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 등의 문제에서 발단된 것이라고 한다면, 변경지역에 있던 소수민족의 반란은 대체로 한인과의 갈등 속에서 성장하였고, 1860년 이후 중국 사회에 만연하게 된 반기독교 사건들, 즉 교안(敎案)은 서구 침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854년에 중국 남서부의 운남에서 일어난 회족의 반란은 회족과 한족과의 은광 쟁탈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뒤이은 56년의 반란에서 회족 전사 두문수는 운남의 성도인 대리를 새로운 회교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1854년에는 운남접경의 귀주에서 또 다른 소수민족인 묘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1862년에는 중국서북부의 섬서와 감숙지방에서는 과중한 세금부과와 자연재해 및 한족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과 태평천국군의 섬서 진입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여 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런 반란들은 대체로 한족지배에 대한 소수민족의 저항이라는 특색이 있다.



이에 반해 반기독교 운동은 주로 한인 지식인들과 민중들이 외국인 선교사 및 중국인 기독교도를 공격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천진조약과 북경조약에서 기독교의 포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음은 이미 기술하였지만, 서양인 선교사에 대한 반감은 그들이 중국의 전통문화와 질서를 이해하기 보다는, 파괴하려고 한다는데 있었다. 확실히 명대의 마테오 리치에 비교한다면, 근대의 서양 기독교는 중국문화를 멸시하고,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 사대부들이 이에 반발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반기독교 운동은 1860년대부터 시작되어 189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고, 의화단 운동을 통해 대규모로 폭발되었다. 그 내용은서양 선교사의 살해와 교회의 방화, 중국인 기독교도의 공격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국가들은 무력으로 청정부에 책임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였고, 청정부는 이에 응하였다.


 

종교의 다원화, 서양 문물 소개, 사회사업 등에부분적으로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독교가 중국을 이롭게 한다기보다는 침략의 선봉으로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양자에게 모두 불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19세기 중엽 이후의 민중운동은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한편으로, 소수민족의 한족에 대한, 또 한인의 서구열강에 대한원초적 민족주의를 발효시켰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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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애국운동

1919년 북경에서 5·4운동이 폭발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구민주주의혁명에서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이전되는 위대한 대결절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국이 패배를 선포함으로써 끝났다. 영국과 미국·프랑스·일본 등 전승국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베르사유 강화회의를 개최하였고, 중국은 전승국의 자격으로 회의에 출석하였다. 중국정부의 대표는 제국주의의 중국에서의 특권을 폐지하고, 중·일 간의 ≪21개조≫를 취소하며, 독일이 산동에서 취한 권익을 회수하는 등의 요구를 회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는 중국의 국가영토주권을 옹호하려는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독일이 전쟁 이전 산동에서 가지고 있었던 각종 특권을 일본이 접수하게끔 결정하였다. 중국은 침략당한 권익을 회수하지도 못한 전승국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도리어 패전국의 대우를 받게 되어 분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파리 강화회의는 제국주의 열강의 나누어 먹기 식의 회의가 되어버렸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제정된 이른바 ≪화평조약≫을 매국적인 북양군벌정부는 승인하고자 서명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각계는 놀랐고 군중의 감정은 격앙되어 중국 인민 내부의 애국적인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5월 4일, 북경의 13개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에서 시위집회를 개최하여 제국주의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중국 문제에 대한 결정에 항의하고, 중국 대표에게는 ≪화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친일파 관료 조여림, 육종여, 장종상 등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밖으로 주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국적을 징벌하자≫, ≪조약서명을 거절하라≫, ≪죽음을 걸고 청도를 되찾자≫ 등의 구호를 소리높여 외쳐댔다. 시위학생들은 장종상을 몹시 두들겨 팼으며 조여림의 주택 조가루에 불을 놓았다. 북양군벌정부는 많은 군인과 경찰을 출동시켜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북경의 학생들은 이에 격분하여 동맹휴교를 함과 동시에 전국에 통전하였다. 천진·상해·장사·광주 등 전국각지의 학생들은 분분히 호응하여 동맹휴교를 전개하고 거리로 나갔다. 6월3일, 북경 학생들은 노천 강연을 전개하였다. 이 때 다시 북양군벌정부는 강연을 하는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전국 인민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6·3≫이후 중국 노동자계급이 이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애국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6월 5일부터 상해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실행하고 학생들은 동맹휴교에 들어갔으며 상인들은 철시를 실시하였다. 10일, 상해에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6, 7만 명을 헤아렸다. 운동의 중심은 북경에서 상해로 이전되었으며, 운동의 주력은 학생에서 노동자로 이전되었다. 동시에 운동은 전국의 20여 성, 100여 도시로 확산되어 상당수의 노동자계급·쁘띠부르주아와 민족부르주아가 참가하는 반제국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북양군벌정부뿐 아니라 제국주의까지 매우 놀라게 하였다. 전국 인민 특히 노동자계급의 강대한 압력 아래, 북양군벌정부는 체포한 학생들을 석방하였으며 조여림, 장종상, 육종여 3인의 ≪사직≫을 비준하였다. 28일, 강화회의에 참가한 중국대표단은 전국 인민의 압력 아래 ≪화약≫에 대한 서명을 거절하였다. 5·4애국운동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5·4운동 동안 중국공산당이 탄생되지는 않았으나 이대교, 진독수 등 일군의 초보적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은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사실상 이번 반제투쟁의 조직자였고 지휘자였다. 모택동·주은래·운대영 등은 각기 장사·천진·무한 등지에서 이번 반제애국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지도하기도 하였다. 노동자계급이 독립된 정치역량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함으로써 5·4운동은 철저히 비타협적인 반제반봉건 혁명운동이 되었다. 5·4운동은 중국 신민주주의혁명의 시작이며 중국공산당 성립을 위한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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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호호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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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역사적 배경,이념

1921년에 성립한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1991년으로 70년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중국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에서 탄생되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쓴 ≪공산당 선언≫이 출판되면서 탄생하였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현재로 143년이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저작에서 자본주의사회 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에 근거하여, 계급이 소멸되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은 3가지 발전단계를 경과한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예견하고 설명하였다.
첫번째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광대한 노동인민을 이끌어 폭력적으로 부르주아를 타도, 자신의 통치를 수립하고 자신이 통치계급이 되어 민주를 쟁취하는 단계로, 노동자혁명의 제일보이다. 두번째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정치통치를 이용하여 점차 부르주아의 모든 자본을 탈취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 즉 통치계급으로 성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는 단계이다. 이것은 곧 국민경제를 사회주의로 개조하늘 것이며, 아울러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하는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사회주의 개조와 사회주의 건설을 평화롭게 발전시키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인민정권과 이미 공유화된 생산수단을 이용하여 가능하면 신속하게 총생산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장기적인 건설과 개혁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자체는 부단히 변화하고 부단히 진보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조건 아래 긴 발전과정을 통해서야 당면의 자본과 토지소유권의 자연법칙에 따른 자연발생적 작용을, 자유롭게 연합된 노동의 사회경제발전법칙에 따른 자연발생적 작용으로 대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광대한 인민의 재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생산력을 고도로 증가시킬 수 있으며, 집단재산의 모든 원천도 충분히 발현시킬 수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다시는 존재할 수도 또 재생산될 수도 업게 할 수 있으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전제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탄생된 지 71년이 지나고, 러시아의 1917년 10월혁명과 중국에서의 1919년 5·4운동을 거쳐서야 중국에 마르크스주의가 전파되었고, 아울러 이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노동자계급과 광대한 인민들에게 장악되었다. 왜냐하면 전파되었을 당시 중국에 200만 정도의 현대산업 노동자가 있어 노동운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노동운동이 서로 결합된 산물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언급하였듯이 중국 인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습득한 이후 25년이라는 장기간의 시간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인 중국 지주계급과 관료부르주아의 중국 인민에 대한 통치를 끝장낼 수 있었다.
중국 인민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습득하였다는 모택동의 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문구를 단순히 암송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원리와 중국혁명의 구체적인 실천을 성공적으로 정확하게 결합시켰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정확하게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쟁·실패, 재투쟁·재실패, 즉 실천·인식, 재실천·재인식이라는 여러 차례의 반복된 나선형식의 전진과정을 경과해야만 했다.
그리고 실천과 인식의 주체는 개별 지도인물과 지도집단이 아니었고, 당 집단과 노동자계급과 광대한 대중이었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제가 결합되는 과정은 당의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는 과정이었으며, 대중으로부터 시작하여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대중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론과 실제의 결합과 지도와 대중의 결합이라는 순환은 실천적 결과를 통하여 진리가 검증되고 진리가 발전되는, 즉 진리를 견지하고 잘못을 수정하는 자아비판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이론과 실제의 결합(실사구시), 지도와 대중의 결합(대중노선)과 자아비판은 모택동이 ≪연합정부를 논한다≫에서 개괄한 중국공산당이 중국 인민 가운데서 만들어낸 새로운 사업작풍이었다. 이 세 가지는 다른 정당과 구별되는, 중국공산당만이 가진 세 가지 특징이었다. 또한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이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에서 얻은 세 가지 근본원칙, 즉 모택동사상의 세 자지 근본원칙이었다.
중국공산당 70년의 역사는 위대하고 빛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어렵고 복잡한 것이기도 했다. 이 70년 가운데, 앞의 28년은 당이 중국 인민을 이끌고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전개한 단계이며 후반 42년은 당이 중국 인민을 이끌고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전개한 단계였다. 신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은 성질이 다른 것이나, 서로 연관된 것이고 서로 연결된 두 개의 과정이었다. 신민주주의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의 필요한 준비여고, 사회주의 혁명은 신민주주의혁명의 필연적 추세였다. 이 두가지 혁명의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을 이끌고 힘차게 투쟁을 전개하여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고, 또 심각한 좌절도 경험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은 후 중국 인민을 이끌고 계속 전진하였다.
28년간의 신민주주의혁명 중, 당과 중국 인민은 1923년부터 1927년까지의 제1차대혁명 초기와 중기에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 후기, 즉 1927년 상반기에 비통한 실패를 경험하였다. 1927년부터 1937년까지의 10년 동안의 토지혁명기간 중, 전기인 1927년부터 1932년까지는 노동자·농민 홍군이 30만명에 달하는 등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중기의 1934년에 다시 제5차 반포위공격과 대장정 초기에는 비통한 실패를 경험하였다. 이와 동시에, 승리와 실패에 대한 경험을 총결산하는 가운데, 또 마르크스주의를 교조화하고 코민테른 결의와 소련 경험을 신성화하는 가운데, 또 마르크스주의를 교조화하고 코민테른 결의와 소련 경험을 총결산하는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중국 실제에 결합시키려는, 모택동을 대표로 한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이론이 제1차대혁명 중에 싹트고 토지혁명전쟁 전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 준의회의를 거쳐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정확한 노선은 전 당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확립한 이후, 1935년 1월에서 1937년 7월에 걸친 토지혁명전쟁 후기와 1937년 7월에서 1945년 8월까지의 항일전쟁시기에, 모택동사상은 체계화되고 다방면으로 전개되어 성숙한 경지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 70년 역사상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중국의 실제와 결합시키는 첫번째 역사적인 비약이 실현되었다. 즉 당은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고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신민주주의혁명을 통하여 혁명승리 후 사회주의혁명의 길로 즉각 들어설 수 있는 정확한 길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모택동사상의 지도 아래, 중국 인민의 혁명역량은 8년 간의 항일전쟁에서 이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1945년 8월부터 1949년 10월까지의 4년 간의 전국해방전쟁을 거쳐 중국혁명은 결국 전국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노농연맹을 기초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것이다. 이 승리는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노동자혁명의 제일보 승리, 즉 정권취득의 승리였다. 이 때부터 중국은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섰으며, 중국 사회는 사회주의 과도기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부터의 42년 간의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단계도 마찬가지로 성공과 실패의 반복된 시련을 겪었다. 이 42년은 4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는데, 즉 1949년 10월부터 1956년 9월 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이전가지의 기본적인 사회주의 개조 완성기 7년, 1956년 9월부터 1966년 5월까지의 전면적인 사회주의 건설기 10년,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의 문화대혁명 10년, 1976년 10월 이후 사회주의 현대화건설 신시기 10년이 그것이다.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는 7년은 확실히 개가행진의 시기였으며, 1956년부터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진입하였다. 중국혁명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과학사회주의가 중국에서 거두고 또 세계정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첫번째 위대한 승리였다고 한다면, 1956년 사회주의 개조의 기본적인 완성은, 과학사회주의가 중국에서 거두고 또 위와 동일한 세계적인 의의를 가진 두번째의 위대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택동사상이 거둔 빛나는 승리였다. 중국 사회주의의 개조, 특히 자본주의 상공업의 사회주의 개조는 평화적인 방식, 즉 경제적으로는 구매하고 정치적·사업적으로는 자본가에게 적당한 안배를 부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중국 사회주의사업에서도 서둘러 성공을 구하는 중대한 편차와 순수함을 서둘러 구하려는 편차를 보였다.
1956년 초부터 1957년까지,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원은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폭로되었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소련이 범하였던 잘못된 경험에 비추어 중국 독자의 사회주의 건설 경험을 총결산하고, 중국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방식을 탐색하고, 주요한 성과도 거두었다. 주요한 성과는 다음과 같았다. 즉 민주를 확대하고자아비판을 발전시키는 방식을 채용하고, 여러 방면의 일을 통일적으로 개혁하고 돌보며 적당히 안배하고 국가와 집단, 개인 삼자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는 방침을 채용하고, 장기공존과 상호감독, 그리고 백화제방·백가쟁명의 방침을 채용하며, 중공업과 경공업·농업·연해와 내지·경제건설과 국방건설·중앙과 지방·한족과 소수민족·중국과 외국 등 각 방면에 걸친 관계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침을 채용하였다. 인민 내부의 모순(이것은 사회주의사회의 주요모순이다)을 정확히 처리하여 모든 적극적인 요소를 사회주의 건설에 동원되도록 하며,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전 당과 국가생활 중의 민주집중제를 완비하고, 민주적이며 집중적이고 자유롭고 또 기율 있고 개성을 발전시키며 통일의지가 있는 생기발랄한 정치국면을 조성하였다. 사회주의의 개조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파괴하는 반혁명분자는 반드시 의법조치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모든 반동계급·반동파에 속하였던 인물에 대해서는 그들의 통치가 전복된 후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파괴행위를 하지 않거나 소란을 피우지만 않는다면, 그들에게 생활의 출로를 부여할 뿐 아니라, 그들을 적극적으로 교육시켜 노동하는 가운데서 법을 준수하는 사회주의 공민으로 개조시켜 소극적인 요소를 적극적인 요소로 변화시켰다. 1956년부터 1957년에 걸친 이 같은 탐색과정을 통해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 이후 등소평이 이끈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이론과 노선의 기본적인 틀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은 사회주의를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데 사상적인 준비와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고, 또 반식민지·반봉건사회의 잔재의 영향으로, 그리고 경제·정치·문화·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소련의 고도의 중앙집권관리체제 형식을 채용함으로써 조성된 위험으로 인하여, 중국공산당은 1951년부터 1978년 12월까지 21년 간 지도사상의 측면에서 사회주의사회의 계급투쟁을 확대하는 잘못을 범하였고, 사회주의 건설과 사회주의 개조의 측면에서는 시급히 성공을 구하는 등의 좌경적인 잘못을 범하였다. 먼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 간의 대약진운동은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에게 심각한 손실을 주었다. 1961년 하반기부터 1966년 상반기까지 5년 간, 당은 전국인민을 이끌고 국민경제를 조정하고 실제사업 중의 좌경적 착오를 바로잡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이 노력은 현저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등소평이 지적하였듯이, 사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보다 더욱 심각하고 더욱 기간이 긴 전국성의 좌경 착오를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에게 미쳤다. 등소평은 ≪1957년 이후 중국 당의 중요한 착오는 좌경이었으며, 문화대혁명은 극좌였다≫고 단언하였다.
문화대혁명 10년 간의 큰 재해로 전 당과 전 인민은 크게 깨달았다. 그들은 1976년에 수천, 수백만 명이 참여한 4·5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같은해 10월에 사인방을 분쇄하고 문화대혁명의 동란을 마무리하는 데 위대한 대중적 기초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1978년 12뭘 11기 3중전회 이후 모택동 만년의 좌경적 착오를 바로잡고 경제·정치·문화·사회 각 방면에 걸친 고도의 집권적 사회주의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데 위대한 대중적 기초를 다졌다.
11기 3중전회 이후 1982년 9월 제12차 전국대표대회, 1987년 10월 제13차전국대표대회를 거쳐 1990년 12월 13기 7중전회에 이르기까지, 등소평 지도아래 중국공산당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을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사상의 이론과 노선을 견지·발전시킨 것이었다. 이 시기에 당은 중국의 1950년대 중기의 사회주의 개조의 기본적인 완성에서부터 21세기 중엽의 사회주의 현대화의 기본적인 실현에 이르기까지를 사회주의 초급단계라는 과학적인 논단을 제출하였다. 즉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4항의 기본원칙 견지, 개혁개방의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노선, 그리고 일련의 유효한 방침정책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11기 3중전회는 역사와 당면의 실천경험을 신중히 결산하면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12개 조의 주요원칙을 개괄하였다.

1. 노동자계급 지도의 노농연맹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독재를 견지하고, 인민의 대표제도를 부단히 완비하고, 공산당 지도의 다당합작과 정치협상제도를 부단히 완비하고, 광범위한 애국적 통일전선을 부단히 굳건히하고 발전시키며, 사회주의 민주와 사회주의 법제건설을 강화하는 데 노력한다.
2.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사회주의의 근본임무로 삼아 현대화건설에 매진하며 부단히 인민의 물질문화생활수준의 향상에 노력한다.
3. 경제·정치체제와 기타 영역의 관리체제를 부단히 완비하는 것을 통해, 중앙·지방·기업과 광대한 노동 인민들의 능동성·적극성과 창조성을 충분히 이끌어낸다.
4. 대외무역관계를 발전시키고 외국자본을 이용하고 그리고 선진기술을 유치하는 등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경제특구·경제개방구를 운영하고 필요한 경제정책과 융통성 있는 조치를 취하여 부단히 대외개방을 확대한다.
5. 사회주의 공유제를 주체로 한 다양한 경제성분이 병존하는 소유제 구조를 견지하고, 개인경제·사영경제와 기타 경제성분이 공유제 경제에 대해 유익한 보충작용을 발휘토록 하고, 아울러 그들을 정확히 관리하고 인도한다.
6. 사회주의의 계획상품경제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을 상호 결합시키며, 국민경제의 지속·안정·협조발전을 촉진하는 데 노력한다.
7. 노동에 따른 분배를 기축으로 기타 분배방식을 보충하는 분배제도를 실행하고, 성실한 노동과 합법적인 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일부 사람과 일부 지역을 허락, 지지하고 먼저 부를 축적한 사람이 아직 부를 축적하지 못한 사람을 돕도록 고무하여, 전체 인민과 전체 지역이 점차 함께 부유해지도록 한다.
8.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조국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계승·발양하며 세계상의 모든 우수한 문화성과를 흡수하여, 전민족의 사상·도덕과 과학·문화소양을 부단히 향상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건설한다.
9. 평등호조·단결합작·공동번영의 사회주의 민족관계를 건립, 발전시키고, 민족구역자치제도를 견지, 완비하고 민족차별대우·민족억압·민족분열에 반대한다.
10. 한 국가·두 제도라는 구상과 실천에 따라, 조국의 통일대업을 점차 실현한다.
11. 독립자주적인 평화로운 외교정책을 견지하고 평화공존 5개 원칙의 기초 위에 모든 국가와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며, 패권주의와 강권주의 정치에 반대하고, 피압박 민족과 피압박 인민의 정의로운 투쟁을 지지하고 세계평화를 옹호하며 인류진보사업을 촉진한다.
12. 공산당의 지도를 견지하며 당의 지도제도·지도작풍과 지도방법을 부단히 완비하고 당의 정치·사상·이론과 조직건설을 강화하여, 당을 사회주의 사업의 굳건한 지도핵심으로 성장시킨다.

11기 3중전회 이후 당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정확한 길을 찾았으며,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이론과 노선을 만들어내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 70년 역사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중국 실제와의 결합의 두번째 역사적 비약이 실현되었다. 이것은 또한 과학사회주의가 중국에서 취득한 세번째 위대한 승리였다. 현대화하고, 고도의 문명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주의 국가, 즉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이론·노선의 제출과 그것의 실현은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의 인류에 대한 중요한 공헌이었다.
중국공산당 70년의 역사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이 획득한 신민주주의혁명의 승리, 사회주의 개조의 기본적인 승리와 사회주의 건설의 중대한성과는 모두 실사구시의 사상노선과 대중노선의 사업방침, 그리고 수시로 진리를 견지하고 수시로 잘못을 수정하는 자아비판의 방법을 통하여 획득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당과 인민이 신민주주의혁명 단계에서 맞부딪쳤던 1927년과 1934년 두 번에 걸친 참담한 실패와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단계에서 맞부딪쳤던 3년 간의 대약진운동과 10년 간의 문화대혁명의 심각한 좌절은 모두 실사구시의 사상노선과 대중노선의 사업방침, 그리고 진리견지와 잘못을 수정하는 자아비평이라는 3가지 훌륭한 전통작풍, 즉 반드시 영원히 계승하고 발양시켜야 할 모택동사상의 3가지 근본원칙을 위반하였던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11기 3중전회 이후 수년 간, 당이 집행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노선과 개혁·개방의 총방침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랄 만한 성과를 이미 거두었다.
이 기간에 국민총생산액은 배로 증가하였고 인민생활이 현저히 개선됨으로써 11억 인구의 의식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1990년대에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은 평균적으로 생활이 안정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분투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실현한 이후 다음 세기 중엽에는 국가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통해 중진국의 국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더욱 분투할 것이다. 중국공산당 70년 간의 옳고 그른 양측면의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익히고 당의 훌륭한 작풍과 성공의 경칩을 발휘하는 것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노력에 유효할 것이다.
간단명료한 중국공산당사인 이 책은 이 같은 목적을 위하여 씌어진 것이다. 이 책이 개혁에 뜻이 있고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독자 제위께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70년 간 중국공산당사의 내용이 상당히 풍부하고 매우 복잡한 반면 우리의 수준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러 부분을 잘못 서술하고 소흘히 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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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영국은 인도를 통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여 중국산 차 수입에 따른 무역 적자를 해결하고자 함으로 중국에서는 경제적인 타격뿐만 아니라 아편 중독자로 인한 심각한 사회문제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부도덕한 행동까지 스스럼없이 하는 영국의 목적은 중국의 식민지화였다.
산업화를 이룩한 영국의 막강 해군력을 당할 수 없었던 청은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과 불평등한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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